코로나는 아픈 지구의 외침이다

이 글은 <가톨릭평론> 33호(2021년 가을)에 실린 글입니다.

코로나 감염병이 시작된 지도 어느덧 일 년 하고도 절반이 넘어섰다. 이제 백신이 상용화되기 시작했는데, 접종은 국가별로 다양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으며 백신이 특정 국가의 소유물이 되기보다 인류를 위해 공공재로 사용되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이 시기 코로나19의 변종인 델타 바이러스가 등장했고, 빠른 속도로 사람들 사이에서 확산되고 있다. 변이 바이러스에 의한 감염자 수가 심각한 상황에 이르더라도 백신을 접종한 사람들에게는 덜 치명적이고 사망률도 낮다고 한다. 국가마다 백신 접종을 계속 장려하면서 자유로운 사회활동을 재개하고자 할 것이다. 반면 백신 접종이 불가능하거나 여의치 않은 나라에서는 변이 바이러스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수많은 사망자가 발생하고 있다.

아프리카 지역에서 선교하다 잠시 귀국한 한 선교사의 말을 빌리면 가난, 기아, 질병으로 일상에서 생존의 위험을 겪는 나라에서 코로나 감염병은 그저 이미 자신들이 겪는 일상의 고통 중 하나일 뿐, 백신보다는 생존에 필요한 기본적인 것들의 충족이 더 절실한 상황이라고 한다. 대한민국은 코로나 전염병 방역에 성공한 전 세계의 모범이었지만, 아직 백신 수급이 원활하지 못하고 백신을 접종하기 시작하면서 느슨해진 거리 두기로 변이 바이러스가 기승을 부려 제4차 대감염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사람들은 백신 접종에 협력하면 곧 좀 더 자유로운 경제활동이 재개되고 고립된 일상의 삶이 끝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그 끝이 어디인지 불투명해짐에 따라 사람들이 느끼는 답답함이 배가되고, 그 인내심이 한계에 도달한 것 같다.

이 시점에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대부분 의료계의 견해다. 코로나 감염병은 단기간에 종식되지 않을 것이며, 설령 종식된다고 해도 이와 유사한 사태는 다시 찾아올 것이다. 따라서 시간을 두고 좀 더 완성도가 높은 백신이 만들어질 때까지 이러한 상황과 공존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는 바로 우리가 위기에 처한 지구 생태계를 돌보고 치유하는 데 관심과 힘을 모으는 것이라 생각한다.

근래 코로나19의 변종인 델타 바이러스가 확산되고 있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근래 코로나19의 변종인 델타 바이러스가 확산되고 있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지구 생태계 위기의 가시화와 이에 대한 인식의 확산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코로나 감염병이 우리에게 생태계 위기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 주었다는 점이다. 그동안 우리가 누리던 풍족함과 편리함을 대가로 지구 생태계의 위기가 가속화되었고, 이로 인해 인간 자신의 삶이 위협받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지구상에는 인간을 포함한 다양한 생명과 무생물이 존재하는데, 각각 직간접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생태계(ecosystem)라는 거대한 그물망을 이루었다. 이 생태계는 외부로부터 어느 정도 위협이 가해지더라도 스스로 원상회복할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그 위협이 임계점(티핑포인트)을 넘어서면. 자신을 복원하는 능력을 상실할 것이라 경고한다. 마치 우리 몸이 자가 면역력을 갖고 있지만, 몸의 위험 수위를 알리는 표징(감기 몸살과 열)을 무시한 채 쉬지 않고 혹사하면 죽음에 이르는 것과 같은 이치다.

과학자들은 이미 1960년대부터 자연의 무차별적 착취와 파괴를 담보로 한 현대문명의 근간인 산업 발전과 진보가 지구 생태계의 위기를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해왔다. 이는 1990년대부터 전 세계적으로 가시화되기 시작했고, 예상한 대로 우리는 현재 대규모의 자연재해(가뭄, 태풍, 이상기후, 산불 홍수 등)와 감염병, 이로 인한 사회적 위기, 경제적 위기를 겪고 있다. “이는 너무나 복합적인 상황으로 연결되어 있어 개별적으로 분석하고 설명될 수가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현재 세상의 체제는 지속될 수 없다는 점이다.”('찬미받으소서', 61항)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변화가 가능하다는 말이 있다. 코로나 감염병을 겪으면서 우리가 알게 된 사실이 전 지구적 위기를 극복하는 데 개인적, 국가적 차원에서 힘을 모으는 촉매 역할을 하리라 기대해 본다.

 

지구 생태계 위기 극복을 위한 과학적 제언: 생명 시스템의 회복

과학은 생태계 위기에 처한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와 관련해 우리를 둘러싼 우주와 우리가 사는 지구의 객관적 사실과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대처 방법을 제시한다.

천문학자 칼 세이건은 현재 우리가 사는 이곳은 우주의 암흑 속을 떠도는 작은 행성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일깨우며, 무한한 우주 안에서 먼지에 불과한 지구상에서 벌어지는 인간중심의 문명과 자만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깨달을 것을 다음과 같이 촉구한다.

"지구는 코스모스라는 거대한 극장의 아주 작은 무대입니다.... 이곳에서 우리가 사랑하고, 알고, 들어봤으며, 지금까지 존재한 모든 사람이 살았습니다.... 잠시 동안 저 작은 부분의 지배자가 되려 한 탓에 흘렸던 수많은 피의 강물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의 만용과 자만심, 우리가 우주 속에 특별한 존재라는 착각에 대해 저 창백하게 빛나는 점은 이의를 제기합니다. 우리 행성은 사방을 뒤덮은 어두운 우주 속의 외로운 하나의 알갱이 불과합니다. 이 거대함 속에 묻힌 우리를, 스스로가 자처한 파멸에서 막아줄 도움이 외부에서 올 기미는 보이지 않습니다. 지구는,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생명을 품은 유일한 행성입니다. 우리 종이 이주할 수 있는 곳은 없습니다. 잠시 방문할 수는 있겠지만, 정착은.... 아직 불가능합니다. 좋든 싫든 현재로선 우리가 머물 곳은 지구뿐입니다. 저는 이 사진이 우리가 서로 좀 더 친절하게 대하고 우리의 유일한 보금자리인 창백한 푸른 점을 소중히 보존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임을 강조하는 것 같습니다."(BBC 다큐멘터리 시리즈 '코스모스' n°13 중에서)

과학자들은 지구 온난화를 산업화 이전의 수준에서 섭씨 1.5도로 유지하면 기후변화의 가장 위험하고 돌이킬 수 없는 영향(Tiping point)을 제한할 수 있다고 발표한 바 있다. 그리고 지난 2018년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IPCC) 제48차 총회에서 전 세계 195개국은 2030년까지 지구온도 상승폭을 2010년 대비 45퍼센트로 낮추고 2050년까지 지구 온도 상승을 1.5도 내외로 줄이기 위해 노력하기로 했다. 그 방법은 석탄연료 사용을 줄이고 이를 재생에너지로 대체하며, 단순하고 간단한 삶의 방식을 통해 이산화탄소 방출을 중지하고, 숲을 조성해 대기 중에 남아 있는 탄소를 흡수해 지구상에서 탄소 방출을 제로화하는 것이다.

이러한 실천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의무이며, 특별히 이 지상 에너지의 대부분을 사용하는 부유한 국가와 그 국민들이 중점을 두고 실천해야 할 사항이다. 이와 관련해 산업화 문명의 진원지였던 유럽에서(영국, 독일, 북유럽 등) 어느 국가보다 생태계 위기의 주원인인 탄소배출을 막기 위한 정책을 국가적, 국제적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실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여겨봐야 한다. 지난 7월 유럽연합은 2026년부터 들어오는 수입품목에 탄소세를 적용하기로 했다는 획기적인 소식을 내놓았다. 우리나라가 지불해야 할 탄소세를 계산해보면 어림잡아 1조 원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 엄청난 비용을 탄소세로 내야 할 형편이다. 중국은 물론 과도 탄소 배출국 중 하나인 우리나라도 이렇게 탄소제로 운동에 소환될 것이다.

지구의 생태위기를 피할 또 다른 방법으로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의 제언이 있다. 그는 생애 마지막 강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간이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이 땅은 과거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광대하고 무한한 자원을 보유하고 날로 기하학적으로 증가하는 인류를 포용할 수 없다. 따라서 지구의 한정된 재화를 차지하려고 서로 싸우기보다는 우주로 눈을 돌리자고 권고했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이미지 출처 = Pixabay)

지구 생태계 위기 극복을 위한 종교적 제언: 심층생태학, 생태적·우주적 영성

프란치스코 교종의 회칙 '찬미받으소서'는 오늘날 인류가 처한 위중한 현실을 인식하고, 인간 삶의 태도가 개선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인간-자연의 지속 가능한 공존과 사람 사이의 지속 가능한 공존을 저해하는 인간 자신이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로부터 회개다. 바로 지구 생태계를 파괴하고 위기에 치닫게 하는 인간중심의 사고를 극복하는 생태적 회개를 의미한다.

그 중심에는 시대를 막론하고 다양한 양상으로 문제를 야기했던,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인 탐욕과 교만이 연결되어 있다. 인간의 역사와 함께한 기성 종교는 이러한 인간 성향의 기원과 이로 인해 발생하는 고통의 해결과 정화의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이는 내면적 수양과 전인적인 삶의 태도 변화를 요구한다. 우선 절대적인 인간중심적 사고를 근간으로 이룩한 현대 산업화 문명이 어떻게 지구 생태계를 파괴해 왔는지 직시하고, 그동안 자연의 착취와 파괴를 담보로 우리가 누려 왔던 풍요와 안락함을 추구하는 삶의 양식을 성찰하고, 내면적 수양을 통해 의식을 전환하는 것이다. 이는 현대 문명의 가치체계에 익숙해진 정신구조(mental model)의 변화, 이를 통한 전인적 변화를 의미한다. 이러한 방법만이 세상을 파국으로 몰아가는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라는 현대 문명의 두 수레바퀴를 멈추게 할 수 있다.

생태신학자 토마스 베리는 이미 1980년대에 생태대의 도래를 말한 바 있다. 이는 인간을 포함해 세상만물이 주체가 되어 친교를 이루는 성스러운 여정에 관한 것이며, 여기에는 과학과 종교의 지식과 가르침, 즉 생명 시스템과 심층생태학의 관점이 조화롭게 용해되어 있다. 그는 과학자들이 보는 것처럼 우주는 단순히 물리적이고 기계적인 법칙에만 종속된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빠르고 끊임없는 진화의 과정에 놓여 있는 우주는 물리적 차원뿐만 아니라 정신적 영적인 차원을 담고 있다. 인간은 이 우주의 한 부분이자 피조물로, 인간의 고유한 능력인 지성과 영성은 지구 더 나아가 우주에 대한 감수성을 갖게 해주고, 우주와 친교를 이룰 수 있게 해준다. 따라서 이 우주가 건강할 때 인간은 우주로부터 보다 더 창조적이고 역동적인 힘을 얻어낸다. 그러나 우주가 아프고 죽어갈 때는 이를 성찰하고 치유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러한 토마스 베리의 사상에는 생태적·우주적 영성이 기초하고 있다. 그런데 이를 그보다 앞서 더 심층적 관점에서 접근한 두 인물이 있는데 고대 동양의 사상가 장자, 중세 유럽의 영성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다. 이들은 인간의 사고를 초월한 신비적이고 종교적인 관점에서 이 우주와 그 안에서 거대한 생명의 그물로 엮여 있는 세상 만물의 존재의미와 관계성, 그리고 이 안에서 인간 실존의 문제를 주목했다.

장자는 온 우주에서 존재하는 만물은 절대적 존재(도, 道)의 유동에서 생육되며, 하나로 연결되었다고 보았다. 그 원리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덕으로 ‘함이 없이 모든 것을 완성함’이다. 인간을 포함한 만물은 도에서 이러한 무위자연의 덕을 얻어 각각의 형태를 가지며 만물은 무궁한 조화 안에 서로 연결되어 양육하고 성장하고 발전해간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이 자연의 한 부분임을 인정하기보다 지성을 가진 우월한 존재라 생각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제한되고 편협한 앎과 지식, 즉 호불호, 시시시비를 가리는 지식을 세상에 퍼뜨리고 사람들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옳다고 믿는 바를 관철하면서 많은 것을 취하려고 하다 보니 사람 사이에 미움과 다툼, 살인과 전쟁을 마다하지 않게 되었다.

마침내 “산천초목의 정기를 불태워 없애며, 해와 달의 밝음을 가리고, 사계절의 변화를 파괴해 땅 위를 기어 다니는 벌레로부터 하늘을 나는 작은 새에 이르기까지 그 본성을 잃게 하고, 세상이 혼란스럽게” 했다.("장자"(莊子), '거협'(胠篋) 편) 장자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날 생태계 위기의 원인이 인간의 지식에 대한 자만과 탐욕에 기인하며, 이를 충족하려고 자연을 착취 파괴하고, 마침내 자신이 만든 것의 노예로 전락한 인간의 실상을 주목하게 한다. 장자는 이러한 삶에서 해방되어, 단순하고 순박한 무위자연의 태도로 자연의 순리에 따라 살며 자연과 하나 되어 대자연을 유랑하는 즐거움과 자유를 추구했다.

아시시 프란치스코는 오늘날 생태계의 위기가 인간의 눈먼 소유욕에서 유래했음을 보여준다. 성인에게 모든 피조물은 같은 기원 즉 사랑 자체이신 삼위 하느님에게서 유래하며 ‘하느님과 가족적 친교’. ‘우주적 형제자매’로 연결되어 사랑과 애정이 충만한 친교를 나누는 관계다.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영적인 인간은 모든 피조물과 함께 필요한 모든 것을 거저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며 살아가도록 소명을 받았다.

그러나 인간은 스스로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벌거숭이인 존재임을 부끄럽게 여기고, 하느님의 것들(지식, 명예, 권력, 부, 생명 등)을 마치 자기 것인 양 착각하며 이기적 목적을 위해 착복함으로써 고통스럽고 죄스러운 존재로 전락했다. 이러한 이유로 성인은 ‘하느님의 것을 그분께 다시 돌려드리고’, ‘아무것도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지 않는’ 삶을 추구했고, 마침내 모든 피조물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감지하고 피조물과 더불어 주님을 찬미하는 복된 자가 되었다.

결론적으로 두 인물은 시대적 공간과 시간을 초월해 세상 만물의 거주지인 생태계의 원형과 그 신비와 존재 의미, 지구 생태계의 한 부분으로서 인간의 존재 의미, 그리고 진정한 행복을 증언하면서 지구 생태계의 위기를 초래한 현대문명에 대안을 제시해준다. 이는 인간이 자연의 한 부분으로서 온 우주와 함께 영적이며 정신적인 친교를 누리면서 함께 발전하고 성장하며 완성되어가는 삶에 관한 것이다.

 

우주적·생태적 영성의 관점에서 본 여러 종교의 생태적 회개

사실 아무리 과학기술문명이 발달한 시대라지만 오늘날 인류의 정신적 문화적 유산은 기성 종교의 가르침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여러 종교 그중에서 특히 인류의 33퍼센트를 차지하는 그리스도교는 각자 교단의 교세 성장을 위해 현대 문명의 논리(진보와 발전을 위한 경제원리와 이를 위한 통치지배 구조)를 수용하고 그 흐름에 일조함으로써 지구 생태계 위기를 방관했다는 책임을 피할 수 없다.

이는 코로나 감염병과 종교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발표된 그리스도교 교단과 다른 종교 단체의 학술발표와 통계자료 그리고 논문에서 공통으로 지적되는 사항에서 잘 드러난다. 구체적으로 코로나 감염병은 아날로그 시대의 종교가 디지털 시대의 종교로 전환되는 과정을 더욱 촉진했고, 이로 인해 발생할 문제를 좀 더 앞당겨 보여주었다는 공통적 전망을 갖는다. 비대면 시대를 겪으면서 신자 수를 담보로 한 교세 성장의 정체는 재정의 어려움을 초래했고, 종교의 본질에 대한 성찰을 요구했다. 이는 예식과 의례 중심-성직자 중심 신앙생활의 한계, 일상의 신앙생활에서 개인 수행과 영성생활에 대한 갈망, 개인 구원과 현세 지복의 신앙생활에 대한 도전과 종교의 공공성 문제 등으로 드러났다.

이러한 도전은 우주적·생태적 영성의 관점에서 보면 마땅히 다시 숙고해야 할 부분들이다. 그 이유는 우주적·생태적 영성은 힘을 가진 소수 지도자가 통치하는 체제가 아니라 신도의 삶이 중심이 되어 나눔과 친교, 일치를 이루어가는 생태적인 종교 공동체성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는 ‘아래로부터’, ‘주변으로부터’ 시작되기에, 이를 수용하는 새로운 리더십이 필요하다. 즉 보살핌과 양육, 상생이라는 종교적 가르침을 실천할 수 있게 하는 ‘모성적 리더십’이다. 이 지구의 생태적 위기에 관한 근본적이고 적극적인 대처 방법으로 우주적·생태적 영성을 염두에 두었다면, 그 심오한 의미를 잘 아는 종교인이 우주적·생태적 영성의 실현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증명해내야 한다.

이러한 시대적 과제 앞에서 여러 종교의 수행자, 구도자, 수도자의 역할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본다. 이들은 하고자만 한다면 누구보다 세상의 정신구조와 이에 대한 속박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현숙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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